안녕하세요, 오드엠 에세이입니다.


갑자기 질문 하나! 여러분은 가장 최근에 운 게 언제인가요? 무엇 때문에 울었나요?


저는 생각해 보니 가장 최근 운 게 영화 작은 아씨들을 볼 때였습니다. 극중 병약한 셋째 딸 베스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에서 오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보고 눈이 만두가 되도록 울었네요. 발달 장애를 앓는 형을 돌보는 주인공 강태가 맥주를 마신 뒤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면서 형을 부탁하고 떠난 엄마가 원망스럽다며 우는 장면이었습니다.


두 번 모두 가상 현실을 접하고 울었다는 게 공통점입니다. 실제로 제게 벌어진 일로 인해 울었던 기억은 정말 아득합니다. 갑자기 너무 행복한 일상만 가득할 리는 없습니다. 나에게 무관심해졌든가 현실에 무감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듭니다. 그게 아니라면 평소에 울고 싶던 걸 꾹 참았던 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터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작은 일에도 크게 소리를 내며 눈물을 흘립니다. 친구가 과자를 주지 않았다든가 그네를 더 타고 싶은데 못 타게 하면 세상 서럽게 웁니다. 어른들은 그러질 못해요. 울 수 있는 공간도 없거니와 놀랄 가족들을 생각한다면 절대 울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울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 사업을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나를 위해 우는 법을 잊게 됩니다. 우물이 마르듯이 자연스레 눈물도 메말라 갑니다.


그래서 어른에게도 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며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완치했냐고 묻자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라고 대답했다고요.


크게 소리 내어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요즘입니다. 그래도 의연하고 의젓하게 어디선가 일을 하고, 식사를 하고, 일과를 마친 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할 여러분의 발걸음이 눈에 그려집니다.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눈물이 있다면 슬픈 영화를 핑계 삼아서라도 마음의 협곡을 통과해 밖으로 흘러 나가게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눈물은 인간이 더 괜찮은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신이 처방해준 물약이라고 믿으니까요.


이상, 엉엉 울 수 있는 아이의 용기를 닮고 싶은 어른이의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다시 찾아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