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 드리는 오드엠 에세이입니다.

벌써 8월 중순이네요. 비가 그치기만 간절히 바랐는데 해가 반짝 나면서 한여름 특유의 무더위가 순간이나마 느껴졌습니다. 비는 이제 더 이상 오지 않는 걸까요?


언젠가 유년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대화가 왜 그 방향으로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한 친구가 느닷없이 자신이 상처 받았던 경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저를 포함한 친구들이 어느 날 밤 동네의 작은 포장마차에서 만나 오돌뼈를 먹기로 했는데, 그날 약속한 모든 이들이 갖가지 핑계를 대고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바를 가야 해서, 갑자기 남자친구가 보자 해서, 밀린 과제를 해야 해서 등등 이유도 다양했다고요. 결국 아무도 오지 않은 포장마차에서 쓸쓸히 눈물을 떨구며 소주를 한 잔 하고 귀가했다는 것이 친구의 이야기입니다.


안 나타난 친구 1인 저에게는 기억조차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정확히 흔적조차 없는 기억에 대해 10년도 훌쩍 지난 뒤에 사과를 하려니 그것도 쉽지 않더만요. 마음의 상처란 게 참 그렇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본인이 상처의 가해자란 사실을 모릅니다.


우연히 책에서 발견한 구절인데요, 한 정신과 의사가 강연 중에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상처를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렵지 않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반대로 “지금까지 당신 때문에 크게 상처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대답하는 이가 거의 없다고요.


아무도 모르게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들이 10여 년 전 오돌뼈를 먹던 그 때나 지금이나 반복되는 건 왜일까요. 아마도 그건 우리의 성장과정에서 슬픔이나 상처를 표현하기보다 인내하는 것이 지혜로운 거라고 배워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물이 나고 완치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곪아도 마음의 세포가 스스로 재생할 때까지 어떤 치료도 없이 버텨 보기. 흉터가 남으면 틈틈이 상기하며 상처 준 자를 마음 속으로 저주하기.


적어도 마음의 상처카테고리에서는 각자의 닫힌 방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상처가 만연한 일상에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도 나도 상처 받고 사는 걸하며 정당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 타인에게 상처가 되는지 모르니 나 역시 똑같은 잘못을 지속적으로 저지르며 상처 주는 생활 속 악당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정말 아픔을 동반한 상처를 입었다면, 상대의 닫힌 마음의 방문을 똑똑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낮은 목소리일지 언정 나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상대의 공감을 얻는 것, 이해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참고 인내하기가 전부였던 마상 치료 학계에 새로운 예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에 다시 또 찾아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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